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14연대 반란의 진행 === >{{{+1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1891)|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 4.3 사건|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 >-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자[* 초대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John Muccio)가 쓴 『여수반란의 개요와 관찰(Review of and observation of the Yosu Rebellion)』에서 인용. 『여수인민보』는 14연대 반란군에게 점령된 여수에서 여수인민위원회가 1948년 10월 24일 단 한 차례 발행한 신문으로 현재 한국에서는 발굴되지 못했다. 하지만 존 무초는 이 신문을 입수해 영어로 번역했고, 이것을 한국인 연구자들이 한국어로 재차 번역했다.]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 [[http://yosuicc.com/bbs/zboard.php?id=yeosu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 6개 항]]|| 14연대 반란정보를 입수한 여수경찰서(서장 고인수)는 비상소집을 걸어 150명의 본서와 지서 근무 경찰관이 집합하였다. 여기에 부연대장의 연락을 받은 [[군사경찰|헌병대]] 40여명과 합동 작전으로 봉산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광주 경찰청의 명령은 “경찰서 절대사수”였다. 그러나 병력차는 압도적이었으며, 경찰-헌병 연합부대는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반란군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였다. 경찰서를 빼앗은 반란군은 즉시 유치장을 열어 각종 범죄 피의자 50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지급하였다.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다. 또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식사는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였고, 격려사는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 세 번째로 인사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자 14연대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반란의 주역이였던 지창수 상사였다.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이 내린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의해 이미 20일 오전 8시경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400명)은 [[기차]]와 화물 트럭으로 순천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는 지창수 상사의 주장에 의해 2개 중대만 여수에 남았다. 그 탓에 이후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때는 이미 반란군 주력은 없었고,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좌파세력이 조직한 ‘인민의용군’ 정도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19일 야간에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이 돼서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보도가 나왔다.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한다는 보도는 26일자 국제신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평양시|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순천 지역의 좌파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같은날자 ‘[[로동신문]]’, ‘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챠’와 ‘타스’ 통신은 북한 쪽과 쿵짝이 안 맞았는지 반란 이틀 전인 10월 17일에 이미 남조선의 ‘[[대구광역시|대구]]’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다가 21일날 다시 평양방송 인용으로, 남조선 여수지역에서 군대의 반란과 인민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반란은 소련측 지시로 일어난 것이고, 17일 대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도한 것은 일부러 미국측을 헷갈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평양방송이 대한민국보다 하루 먼저 여순 사건을 방송한 것은 북한 배후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평양의 중앙통신은 대한민국의 통신사들이 전국의 지국들과 교신하는 것을 잡아 지체 없이 평양방송으로 흘리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전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여순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학살 자체가 발생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 목숨을 잃은 손양원 목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하는 여수의 시민들도 존재했고 좌파청년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학살했다. 물론 깡패·양아치·부랑아들이 가세해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 죽이기도 해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김지회의 인도로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홍순석은 반란에 주저하는 사병 8명을 총살해 놓은 상태였다.[* 장교인 홍순석이 순조롭게 2개 중대를 합류한 것은 홍순석이 전남 화순 출신이라 이례적으로 현지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반란사병들에게 신분을 보장받고 있었다.] 20일 오후 경 순천을 장악하였고, 21일에는 구례·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약 200명의 병력이 서쪽인 [[보성군]] 방면으로 무단 이탈하였다. 이들은 거의 전부 벌교·보성·고흥·화순·광주 출신이었는데, [[벌교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한풀이식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주력에서 무단이탈한 소규모 부대인지라 광주 방면에서 달려온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걸려 전멸당한다.[* 벌교에서 발생한 반란군의 학살행위와 진압은 [[조정래(소설가)|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조정래)|태백산맥]]》 제1부 〈한의 모닥불〉에 잘 나와있다. 단, 《태백산맥》 1부의 내용과는 달리 주민의 환대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09/2006120900024.html|#]]] 20일 새벽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4연대는 위에서 이미 언급듯이 [[영암사건]]으로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며, 4연대 출신인 김지회와 지창수가 이미 붉은 조직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4연대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10시경 부대 안에 있던 좌파 부사관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이명은 소위, 장인호 소위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학살한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22일에는 15연대장 최남근이 자신의 반란 동참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포로가 된 것으로 위장하여 지리산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군내 조직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27일 다시 탈출을 가장하여 15연대로 귀환하였다.[* 최남근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음에도 북한을 왕래했던 적색분자였다. 심지어 출동 후 15연대에게 실탄도 지급안하다가 2중대장이 난리쳐서 나눠줬을 정도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총살형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